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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복숭아

by 몰림 2021.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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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그날의 이야기



#1
한 일주일 정도 날씨가 좋았다
어느새 새파랗게 잔디가 올라오고 온갖 벌레들도 잠에서 깨어났다
코로나19 때문에,
프로젝트로 바빴기 때문에,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던 나는 특별히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날씨가 좋아서라는 핑계를 대며 차에 앉아 음악을 틀고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바꾸려던 순간 유리에 붙어 나를 노려보는 하얀색 애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와이퍼를 빠르게 움직여 걷어냈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벌레와 마주하는건 나에게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귀가 따갑도록 고목나무의 매미가 울던 여름날 밤,매미보다도 큰 검은색 바퀴벌레는 나의 다리를 타고 원피스 안으로 들어와 날개를 파닥거리며 온 몸을 휘감았다
그날 이후 난 모든 벌레를 혐오한다
유난스럽다는 걸 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잠시 음악에 잠겨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대여섯 살 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2
그때의 나는 초등학교 옆 차가 다닐 수 없는 작은골목 중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곳에 살았다
나는 동네의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골목 어귀에 앉아 깊게 판 땅에 물을 담고 돌멩이를 쌓아 작은 정원을 만들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짜르릉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막걸리가 가득 담긴 양푼 주전자와 털복숭아 한 개를 싣고 비틀비틀 달리던 녹슨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색이 바랜 중절모를 쓰고 다니시던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짜르릉 소리와 함께 내 옆에 가까이와 서야 멈췄다
언니 오빠들이 올때까지 굶고 있을 나에게 5센티미터 정도 너비의 검은 고무밴드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복숭아를 꺼내어 혼자 먹으라며 두 손에 꼭 쥐어주고는 아무 말 없이 주전자를 들어 미소를 지으시며 자전거를 급하게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셨다
생각해 보면 그날의 안주는 상할 대로 상한 털 복숭아였고 그 마저도 눈으로만 드시고 가지고 오셨던 것 같다
 
두 손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컸던 털 복숭아는 여기저기 멍들고 구멍이 뚫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뚫려있는 작은 구멍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것을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투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새 하얗고 작았던 애벌레가 나의 복숭아를 갉아먹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꽤 많이 다르지만 처음 마주한 작은 생명체는 눈이 부셨다
빛을 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했다
어느덧 복숭아의 작은 구멍은 대여섯 살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커져버렸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애벌레는 창밖으로 유유히 꿈틀거리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일시적이었던 스트레스가 수그러들었지만 운전은 할 수 없었다
시동을 끄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기대었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지난 주말의 일이었다
 
#3
그리고 오늘,
올해 들어 가장 맑고 따뜻한 오늘,
나의 할아버지는 그날처럼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간 잊고 지냈던 할아버지와의 기억은 빛의 수채화처럼 나에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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